잊었던 추억, 오늘의 따스함

호텔양식주방에서의 경험

호텔양식주방에 입사를 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이라기보다는 그 시절 저에게는 놀이터 같은 곳이 주방이었습니다. 내일 출근할 생각에 설레서 잠들었던 적은 그때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 자체로 그때는 참 열정이 넘쳤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출근을 하면 형들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뒷치다꺼리도 하고, 몰래 몰래 음식하는 것도 배웁니다. 위생복 왼쪽 가슴 주머니에는 수첩과 볼펜이 항상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양식주방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넣고 다니는데, 필요할 때 수첩을 열어서 메모도 하고 레시피를 확인해서 음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작업대에 올려놓고 쓰다 보니 수첩 구석구석에는 양념들이 떨어져서 얼룩이 지어 있기도 합니다.

하루는 출근을 했더니 프렌치 드레싱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고 하면서 레시피를 열어서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레시피대로 만들어서 저보고 맛을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렌치 드레싱은 기름 드레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올리브오일과 식초를 적당히 섞고, 기호에 맞게 설탕과 후추 그리고 야채 등을 다져서 넣고 잘 섞어서 만드는 드레싱인데, 야채나 생선과 같이 먹으면 상큼하게 먹기 좋은 드레싱입니다.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음식을 맛보는데 이게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시큼하고 미끌거리는 느낌이 익숙하지 않은 맛이라 맛있다 맛없다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낯선 음식들은 원래 그 음식들의 맛이 어떤 건지 모르기에 맛있다 맛없다는 표현 자체가 불가능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내 기호에 맞는 음식들로 만들어 변해 갑니다.

호텔에서 풀무원으로 이직을 하면서 한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낯선 음식들이 아닌 익숙한 음식들을 만듭니다. 한식처럼 익숙한 음식들은 사람들 머릿속에 그 맛의 기준이 다 정확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이것 아니면 음식의 가격이 바뀌어서 그런지 호텔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보다 훨씬 더 긴장을 하고 만듭니다. 이게 어떤 맛이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정확하게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는 건 그만큼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음식을 만들려면 음식을 하는 사람들 머릿속에 맛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준이 필요할 때면 어렸을 적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기준이 됩니다. 엄마가 도시락으로 싸주셨던 반찬들부터 장모님이 해주시던 우럭생선조림, 중학교 때 학교 마치고 나와서 먹었던 쫄면올라가있는 궁중 떡볶이, 대학 때 처음 먹었던 뼈다귀 해장국, 돈 없는 친구들이 즐겨 갔던 실비집 계란말이, 호텔 마치고 형들이랑 갔던 연기 뿌옇던 꼬치집 등등… 메뉴에 이런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때의 맛을 더듬어 가면서 만듭니다. 손님으로 갈 때는 그냥 맛있으면 끝이 나지만, 이걸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연구 분석이 필요해 그 집들을 다시 찾아가서 먹어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난 중학교 때 궁중 떡볶이 집은 간판이 없어져 버렸고, 돈 없던 친구들과 같이 갔던 실비집은 업종이 변경이 되어 있고, 꼬치집도 사라지고 없고 남아 있는 곳은 뼈다귀 해장국 하나만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사장님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갈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다니던 대학교 앞을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대학 때부터 직장과 학교를 같이 다니고 있었기에 친구들과 학교 앞에서 많이 놀지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막걸리 나눠 마시던 집들도 다 없어지고 길도 새로 나서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 데리고 “아빠 대학 때 이런 곳에서 놀았었어.”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면서 어릴 적 갔던 단골집들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시절 같이 했던 추억들도 사라지는 것 같아 참 아쉽습니다. 책에서만 나오는 부모의 그 시절 추억이 자식들의 추억에도 이어지고, 그 시절 젊었던 사장님이 시간이 지나도 노쇠한 몸으로 자식과 함께 같이 반길 수 있는 그런 집들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이를 먹는지 이런 생각들이 오늘은 드네요. 오늘은 잊었던 추억을 찾아보십시오. 그 추억들이 오늘 하루를 참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들어 주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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